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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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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1877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정치인으로,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여 소노라 주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1924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노동 개혁, 군대 개혁, 인프라 건설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반가톨릭 정책으로 인해 크리스테로 전쟁이 발발했고, 미국과의 석유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대통령 퇴임 후에는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하며 멕시코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멕시코로 돌아와 말년을 보냈으며, 멕시코 혁명의 제도화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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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4년의 카예스
본명프란시스코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캄푸사노
출생일1877년 9월 25일
출생지과이마스, 소노라 주, 멕시코
사망일1945년 10월 19일
사망지멕시코 시티, D.F. , 멕시코
안장 장소혁명 기념비 (스페인어: Monumento a la Revolución)
배우자나탈리아 차콘 아마리야스 (1899년 8월 24일 결혼, 1927년 6월 2일 사망)
레오노르 요렌테 (1930년 결혼, 1932년 사망)
부모플루타르코 엘리아스 루세로
마리아 헤수스 캄푸사노 노리에가
정치
소속 정당국민혁명당
노동당 (1929년까지)
군 경력
복무 기간1914년–1920년
참전멕시코 혁명
주요 직책
47대 멕시코 대통령재임 시작: 1924년 12월 1일
재임 종료: 1928년 11월 30일
전임: 알바로 오브레곤
후임: 에밀리오 포르테스 힐
2대 소노라 주지사전임: 호세 마리아 마이토레나
후임: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재임 시작: 1915년
재임 종료: 1919년

2. 초기 생애와 경력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소노라주 과이마스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양아버지이자 삼촌인 후안 바우티스타 카예스는 그에게 세속 교육의 중요성과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심어주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정치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5] 젊은 시절 바텐더,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정치적 기회를 모색했다.[9]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자 프란시스코 I. 마데로를 지지하며 혁명에 참여했다.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의 쿠데타 이후에는 반 우에르타 저항 운동에 가담했으며, 이후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이끄는 제도주의자 세력에 합류하여 군사적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1915년 소노라주 임시 주지사로 임명되었고, 1917년 정식 주지사가 되어 최저 임금 제정, 교육 개혁, 정교분리 강화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이 시기 그의 정책은 일부 논란을 낳기도 했다.

1919년 카란사 정부에서 산업·무역·노동부 장관을 잠시 역임했으나, 곧 사임하고 알바로 오브레곤을 지지했다. 1920년 '아구아 프리에타 강령'(Plan de Agua Prieta|플란 데 아과 프리에타spa) 발표에 참여하여 카란사 정권 타도에 기여했으며, 오브레곤이 임시 대통령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를 거쳐 정식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는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중앙 정치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2. 1. 출생과 성장 배경

대령 호세 후안 엘리아스. 그의 부계 조부.


'''프란시스코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캄푸사노'''라는 이름으로 1877년 소노라주 과이마스에서 태어났으며, 에르모시요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관료였던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루세로, 어머니는 마리아 헤수스 캄푸사노 노리에가였으며, 그는 두 사람 사이의 혼외 자녀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육아를 포기하자, 그는 어머니의 여동생 마리아 호세파 캄푸사노와 그녀의 남편 후안 바우티스타 카예스에게 맡겨져 자랐다.[3] '카예스'라는 성은 양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의 양아버지이자 삼촌인 후안 바우티스타 카예스는 교사 집안 출신이었으나 소규모 식료품 및 주류 상인이었다.[4] 양아버지 카예스는 무신론자였고, 플루타르코에게 세속 교육의 중요성과 당시 국가와 분리되어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심어주었다. 이러한 영향은 훗날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의 사회 개혁 의제에 반영되어, 공교육 확대와 교육, 정치, 노동 조합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5]

플루타르코의 부계 가족은 Provincias Internas의 유서 깊은 가문으로, 주로 엘리아스 곤살레스(Elías González)라는 성씨로 알려져 있었다.[12] 이 가문의 첫 멕시코 정착민은 1729년 스페인 라 리오하에서 멕시코 사카테카스로 이주한 프란시스코 엘리아스 곤살레스(1707–1790)였다. 그는 이후 북쪽으로 이동하여 치와와에 정착했고, 테레나테 수비대 사령관으로서 야키 및 아파치와의 전쟁에 참여했다.[6] 플루타르코의 할아버지인 호세 후안 엘리아스 페레스는 대령이었으나, 1865년 프랑스 간섭에 저항하던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플루타르코의 아버지를 포함한 8명의 자녀가 남겨졌고,[7] 가족의 재산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상당한 토지를 잃거나 매각해야 했으며, 일부는 카나네아 구리 회사에 팔렸는데, 이 회사의 노동 문제는 20세기 초 대규모 파업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7]

학자들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들, 즉 혼외 자녀로서의 사회적 위치, 고아라는 사실, 경제적 및 가정적 어려움 등이 그의 삶의 행보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경험은 그가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근면하고 단호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에서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그의 부모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생아였지만, 종교의 눈에는 더욱 그러했다. 종교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사생아 신분을 부정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8]

젊은 시절 카예스는 바텐더,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으며, 항상 정치적 기회를 모색하는 경향을 보였다.[9]

2. 2. 멕시코 혁명 참여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자 소노라주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란시스코 I. 마데로를 지지했다. 그는 마데로 밑에서 경찰 위원이 되었다.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의 쿠데타로 마데로 정권이 무너지자, 카예스는 소노라주 북부에서 반 우에르타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내전에서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이끄는 제도주의자 세력에 합류하여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판초 비야 세력 등과 싸웠으며, 1915년에는 장군 계급에 올랐다.

카예스는 고향인 소노라주에서 제도주의 군대를 이끌었다. 1915년 그의 군대는 아구아 프리에타 전투에서 호세 마리아 마이토레나와 판초 비야가 이끄는 소노라의 협약주의자 파벌을 격퇴했다.[10] 같은 해 소노라주 임시 주지사로 임명되었고, 1917년에는 정식 주지사가 되었다. 주지사 시절 최저 임금 제정, 교육 개혁, 가톨릭 성직자 추방, 알코올 음료 생산자 처벌 등 논란이 많은 정책을 포함한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야키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1919년 카란사 대통령 아래에서 산업·무역·노동부 장관을 맡았지만, 단기간에 사임하고 같은 소노라주 출신인 알바로 오브레곤을 지지하게 되었다. 1920년 4월에는 '아구아 프리에타 강령'(Plan de Agua Prieta|플란 데 아과 프리에타es)을 발표하여 카란사 정권 타도를 호소했다.

1920년 5월 카란사가 살해되고 소노라주의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카예스는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알바로 오브레곤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그의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맡았다. 1923년 데 라 우에르타가 오브레곤 정권에 반란을 일으키자, 카예스는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3. 멕시코 대통령 (1924-1928)

알바로 오브레곤 대통령 임기(1920~1924) 동안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정치적 기반을 닦은[14]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멕시코 지역 노동자 연맹(CROM)과 노동당 등 조직 노동계와 농민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192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승리했다.[15] 그는 멕시코 역사상 최초로 라디오를 이용해 선거 운동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취임 직전에는 독일프랑스를 방문하여 사회 민주주의와 노동 운동을 연구하며 국정 운영에 대한 국제적 시각을 넓혔다.[16] 1924년 12월, 약 5만 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취임식을 갖고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그의 취임은 포르피리오 디아스 이후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루어진 사례였다.[17]

카예스는 대통령으로서 경제 개발 촉진, 군대 전문화, 사회 및 교육 복지 증진 등을 목표로 하는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했다.[18] 이를 위해 노동 및 농민 조직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또한 멕시코 헌법에 명시된 외국인의 토지 소유 제한, 석유 산업 규제 등의 조치를 시행했으며, 공교육 정비, 중앙은행 창립, 민법 개정을 통한 남녀 동등 권리 보장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 중 가장 큰 논란과 갈등을 일으킨 것은 1917년 멕시코 헌법의 반가톨릭주의 조항을 강력하게 시행하려 한 정책이었다. 카예스는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고 세속 교육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이는 1926년 카예스법 제정으로 이어졌다.[42] 이러한 반가톨릭 정책은 가톨릭 교계와 신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멕시코 서부와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크리스테로 전쟁이라는 격렬한 내전이 발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쟁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남겼으며 카예스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45][49]

임기 4년을 마친 카예스는 자신의 후임으로 알바로 오브레곤을 지명했고, 오브레곤은 1928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오브레곤은 대통령 취임 전에 로마 가톨릭 신자인 호세 데 레온 토랄에게 암살당했다. 오브레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멕시코 정치에 큰 공백을 만들었고, 이는 카예스가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권력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막고 혁명의 성과를 제도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1929년, 훗날 제도혁명당(PRI)으로 발전하는 국민혁명당(PNR)을 창당했다. 이는 이후 카예스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시마토'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3. 1. 1924년 대통령 선거

1924년 7월 대통령 선거1924 Mexican general election|1924년 멕시코 총선영어에서 엘리아스 카예스는 출마하여 승리했고, 같은 해 12월 오브레곤의 뒤를 이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멕시코 역사상 최초로 라디오를 이용해 선거 운동을 벌인 인물이었다.

취임 후 카예스는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1925년 12월에는 멕시코 헌법 27조에 근거하여 외국인의 멕시코 토지 소유와 석유 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이 조치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공산주의자, 볼셰비키라는 비판을 받으며 양국 간의 긴장을 유발하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는 공교육 시스템 정비, 중앙은행 설립, 군대의 전문성 강화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시도했다. 또한 민법을 개정하여 남성과 여성이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도록 보장했다.

토지 개혁에도 힘써, 에히도(공동 경작지) 분배에 있어 오브레곤 정권보다 훨씬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총 3088071ha의 토지를 302,432가구에 분배했는데, 이는 오브레곤 시대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다만 카예스는 토지 분배만으로는 농업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고, 농업 기계 도입, 관개 시설 확충, 농약 보급, 기술 교육 등 종합적인 지원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카예스는 반가톨릭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소노라 주지사 시절과 마찬가지로 멕시코 헌법의 반가톨릭 조항(3조, 5조, 27조, 130조)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가톨릭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했다. 이러한 정책은 가톨릭 교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멕시코 서부와 중부 지역에서 크리스테로 전쟁이라는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훗날 가톨릭 교회는 이 전쟁의 희생자 25명을 성인으로 시성했다.) 카예스 개인의 종교관에 대해서는 Jürgen Buchenau|위르겐 부헤나우de에 따르면 그가 Spiritism|스피리티즘영어 신봉자였다는 주장이 있다.[73] 또한 매튜 버틀러는 카예스 정권의 각료 중에 프리메이슨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멕시코 내 반 성직자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74]

임기 말, 카예스는 대통령의 연임은 금지하되 한 번 임기를 마친 후 다시 출마하는 것은 가능하도록 헌법 13조와 82조를 개정했다. 이는 자신의 후임으로 오브레곤의 재선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실제로 오브레곤은 1928년 대선에서 승리했으나, 취임 전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오브레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권력 공백을 막기 위해, 카예스는 1929년 제도혁명당(PRI)의 전신인 국민혁명당(PNR)을 창당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혁명의 제도화를 추진했다.

3. 2. 주요 정책

1924년 미국 노동 연맹 빌딩 앞에서 찍은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1924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취임 전 독일과 프랑스를 방문하여 사회 민주주의와 노동 운동을 연구하며 멕시코의 상황과 비교하는 등 국정 운영에 대한 국제적 시각을 넓혔다.[16] 그의 재임 기간(1924-1928)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 정책이 추진되었다.

'''경제 및 재정 정책'''

카예스 정부는 재무 장관 알베르토 J. 파니의 주도로 균형 예산과 안정적인 통화 정책을 추구하여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했다. 파니는 농민 지원을 위한 은행 설립을 조언했으며, 특히 멕시코의 중앙은행인 멕시코 은행 설립에 기여했다. 또한 멕시코의 대외 채무 일부에 대한 채무 탕감을 이끌어냈다.

석유 정책은 미국과의 주요 갈등 요인이었다. 카예스는 전임 알바로 오브레곤 정부가 미국과 체결한 부카렐리 조약을 거부하고, 지하자원은 국가 소유임을 명시한 멕시코 헌법 제27조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새로운 석유법 제정을 추진했다. 이는 멕시코 내 미국 석유 회사들의 이익을 위협했기 때문에 미국의 강한 반발을 샀다. 프랭크 B. 켈로그 미국 국무장관은 1925년 멕시코를 공개적으로 위협했으며,[37] 미국 내에서는 카예스 정권을 볼셰비키로 간주하고 "소비에트 멕시코"라고 부르는 목소리까지 나왔다.[38][39] 1926년 새로운 석유법이 제정되고 1927년 미준수 석유 회사의 허가가 취소되면서 양국 관계는 전쟁 직전까지 악화되었으나, 캘빈 쿨리지 대통령과의 직통 전화 설치 및 온건파 드와이트 모로 대사의 부임과 중재를 통해 외교적으로 해결되었다.[40]

'''노동 정책'''

카예스 정부의 노동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루이스 N. 모로네스


카예스는 노동계, 특히 루이스 N. 모로네스가 이끄는 멕시코 지역 노동자 연맹(CROM)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CROM은 카예스의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15] 모로네스는 카예스 정부에서 산업통상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CROM의 세력을 확장하고 다른 노동조합들을 통제하려 했다. 카예스 정부는 헌법 제123조에 명시된 노동권을 시행하여 임금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을 시도했으며, 이 시기 노동 파업 건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그러나 1926년 철도 노동자 파업 당시 정부는 모로네스를 통해 대체 인력을 투입하여 파업을 진압하기도 했다.[19]

'''군사 개혁'''

군 개혁을 주도한 호아킨 아마로 장군


멕시코 혁명 이후에도 군대는 여전히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으며,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카예스는 군대를 국가 통제 하에 두고 전문화하기 위해 호아킨 아마로 장군에게 개혁을 맡겼다. 주요 개혁 내용으로는 ▲장교 진급 시 전문 훈련 의무화 ▲부패 엄단 ▲의무 정년제 도입 등이 있었다. 또한 장교 양성 기관인 영웅 군사 학교를 개혁하여 군의 전문성을 높이고자 했다.[24]

'''인프라 구축'''

1933년 범아메리카 고속도로 멕시코 구간 지도. 카예스 정부 시기 건설이 시작되었다.


멕시코 혁명으로 파괴된 철도망 복구 작업이 계속되었고, 일부 노선은 민영화되었다. 카예스는 자신의 고향인 소노라 주와 멕시코 시티를 잇는 철도 노선을 건설했다.[25] 더 중요하게는, 전국적인 도로망 건설을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국가 도로 위원회를 설립하여 도로 건설을 추진했는데, 이는 농산물 유통을 원활하게 하여 경제를 활성화하고,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지방까지 확대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 프로젝트는 주로 연방 정부 예산과 휘발유세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으며, 외국 자본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 건설 회사 육성에도 기여했다(후안 안드레우 알마잔의 사례).[26] 이 시기 범아메리카 고속도로의 멕시코 구간 건설도 시작되었다.[25]

'''교육 정책'''



카예스 정부는 호세 바스콘셀로스가 시작한 교육 정책을 이어받아 농촌 지역 교육에 투자를 확대하여 2,000개의 학교를 추가로 설립했다. 농촌 교육의 주요 목표는 원주민들을 국민 국가 체제에 통합하는 것이었으므로, 스페인어 교육과 애국심 고취가 강조되었다. 교육부 장관 호세 마누엘 푸이그 카사우랑크는 혁명의 계승자로서 오브레곤과 카예스의 업적을 강조하는 교육 자료를 개발했다.[27] 하지만 중앙 정부의 교육 정책이 지방 현장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며, 지역 실정에 맞는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28]

'''공중 보건'''

시민 건강 증진을 경제 발전의 중요 요소로 인식하고 공중 보건 개선에 힘썼다. 이를 위해 공중 보건 문제를 전담하는 부처를 신설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전염병 예방 접종 장려, 식수 공급 및 하수 처리 시설 개선, 식품 위생 관리 강화 등이 있었다. 1926년에는 의무 예방 접종과 매춘부 등록 등을 포함한 새로운 위생 규정을 제정하여 시행했다.[30][31]

'''법률 개정'''

카예스 자신도 혼외자로 태어난 경험이 있었기에, 민법을 개정하여 혼외에서 태어난 자녀도 합법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자녀와 동등한 법적 권리를 갖도록 보장했다.[33][34] 그는 '엘 투르코'(El Turco, 터키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부모가 시리아나 터키 출신이라는 소문 때문이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32][33] 또한 1926년 전기 통신법을 제정하여 라디오 방송을 정부 규제 하에 두었다. 방송국은 종교적, 정치적 내용에 대한 제한을 따라야 했고 정부 발표를 의무적으로 송출해야 했다.[35]

'''반가톨릭 정책'''

카예스는 반가톨릭주의 성향이 강했으며, 멕시코 헌법에 명시된 반교권 조항(3조, 5조, 27조, 130조)을 강력하게 시행하려 했다. 이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축소하고 추방하려는 시도로 이어졌고, 결국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멕시코 서부와 중부 지역에서 크리스테로 전쟁이라는 격렬한 종교적 무력 충돌을 야기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카예스 본인이 스피리티즘 신봉자였으며 그의 내각에 프리메이슨이 많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73][74]

'''토지 개혁'''

에히도(공동 경작지) 분배 정책을 지속하여, 오브레곤 정권 시기보다 두 배 이상 많은 3088071ha의 토지를 30만 가구 이상에게 분배했다. 그러나 카예스는 단순한 토지 분배만으로는 부족하며, 농업 기계 보급, 관개 시설 확충, 농업 기술 교육 등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외교 (니카라과)'''

니카라과 내전에서 멕시코는 자유주의 세력을 지원한 반면, 미국은 보수주의 세력을 지원하면서 양국 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 이 갈등은 양국이 각자 지지하는 세력을 지원하는 것을 상호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완화되었다.

3. 3. 미국과의 관계



카예스는 알바로 오브레곤 대통령(1920-1924) 하에서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14] 오브레곤 정부 시기에는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으며, 이는 1923년 8월 부카렐리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 조약은 미국의 사업적 이익, 특히 석유 자원에 대한 양보를 포함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 조약을 바탕으로 오브레곤 정부를 공식 승인했으며, 캘빈 쿨리지 미국 대통령은 반군 세력의 무기 확보를 막고 오브레곤 정부에 무기를 지원하기 위해 해군 함대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오브레곤을 지원했다. 카예스는 또한 멕시코 지역 노동자 연맹(CROM)과 같은 노동 조직과의 연대를 구축했는데, CROM의 지도자 루이스 N. 모로네스는 미국 노동 연맹(AFL)의 새뮤얼 곰퍼스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 우드로 윌슨 행정부 시기 멕시코 내 미군 철수에 압력을 가하는 등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15]

드와이트 모로, 주멕시코 미국 대사


1924년 대통령에 당선된 카예스는 취임 후 오브레곤 정부가 체결했던 부카렐리 조약을 즉시 거부하고, 멕시코 헌법 제27조에 근거한 새로운 석유법 제정을 추진했다. 1917년 제정된 헌법 제27조는 지하 자원의 국가 소유를 명시하고 있었으며, 이는 소급 적용될 경우 미국 및 유럽 석유 회사들의 기득권을 크게 위협하는 조항이었다.[36] 이전 멕시코 대법원은 헌법 발효 이전에 이미 운영 중이던 외국 소유 유전에 대해서는 소급 적용이 어렵다고 판결했으나, 카예스는 헌법 정신을 강조하며 석유 자원에 대한 국가 통제 강화를 시도했다.

카예스의 이러한 정책은 즉각적인 미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주멕시코 미국 대사는 카예스를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고, 프랭크 B. 켈로그 미국 국무장관은 1925년 6월 12일 멕시코에 대한 노골적인 위협을 가했다.[37] 카예스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생각한 적이 없으며, 혁명을 이념적 입장이 아닌 통치의 한 방법으로 여겼다. 미국 여론은 멕시코에 최초의 소비에트 연방 대사관이 개설되면서 특히 반멕시코적으로 변했다. 당시 소비에트 대사는 "소비에트 연방과 멕시코만큼 유사점을 보이는 나라는 없다"고 언급했다.[38] 이 후, 미국 정부 내 일부는 카예스 정권을 볼셰비키로 간주하고 멕시코를 "소비에트 멕시코"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39]

새로운 석유법에 대한 논쟁은 1925년에 벌어졌으며, 미국 측은 모든 계획에 반대했다. 1926년까지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1927년 1월, 멕시코 정부는 법을 준수하지 않는 석유 회사의 허가를 취소했다. 미국 대통령과 ''뉴욕 타임스''의 사설에서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멕시코는 일련의 외교적 책략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곧이어 카예스와 캘빈 쿨리지 대통령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설치되었고, 주멕시코 미국 대사 제임스 R. 셰필드는 드와이트 모로로 교체되었다. 모로는 카예스 정부를 미국의 입장으로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정부와 석유 회사 간의 협상을 도왔다.[40]

미국과의 또 다른 갈등의 원천은 미국이 보수주의자를 지원하는 반면 멕시코가 니카라과 내전에서 자유주의자를 지원한 것이었다. 이 갈등은 양국이 서로 상대방이 가장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측을 지원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종식되었다.

3. 4.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갈등 (크리스테로 전쟁)

카예스는 대통령 임기 동안 1917년 멕시코 헌법에 명시된 반가톨릭 조항을 강력하게 시행하고자 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정부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으나, 사회 정의나 인권 문제에는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후아레스 집권기 1,600명 수준이던 성직자 수는 디아스 통치기에 5,000명으로 늘어나며 세력을 확장했다. 교회는 1917년 헌법이 교회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카예스는 교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헌법에 따라 초등학교에서의 종교 교육 금지, 종교의 헌법 비방 금지, 공개적인 종교 행사 금지, 교회 재산의 국가 귀속 등을 추진했다. 그는 자신이 "종교의 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제, 음모를 꾸미는 사제, 착취자로서의 사제"의 적이라고 주장하며 정책의 정당성을 강조했다.[41] 1926년 6월 14일, 카예스는 공식적으로 형법 개정법, 비공식적으로는 카예스법으로 알려진 반성직주의 법안을 제정하여 종교 단체를 금지하고 교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등의 조치를 포함했다.[42][43] 그러나 카예스에 대한 가톨릭교도의 반감은 그의 격렬한 반가톨릭주의로 인해 더욱 커졌다.[44]

이에 가톨릭 교회는 디아스 정권 붕괴 후에도 남아있던 군대, 행정 관료, 대농장주 등 보수 세력과 연대하여 강력히 반발했다. 교회는 정부의 법 집행에 항의하며 미사, 세례, 혼인성사 등 성사 집전을 중단하는 성직자 파업을 3년간 벌였다. 카예스의 강경한 반가톨릭 정책은 특히 할리스코, 사카테카스, 구아나후아토, 콜리마, 미초아칸 등 가톨릭 신자가 많은 지역에서 큰 반발을 샀다. 1927년 1월 1일, 가톨릭 신자들은 "''¡비바 크리스토 레이!''" (왕이신 그리스도 만세!)를 외치며 봉기했고, 이는 크리스테로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크리스테로 전쟁은 정부군과 가톨릭 반군 사이에 벌어진 처절한 내전이었다. 멕시코 정부는 성직자들을 폭력적으로 박해하고, 크리스테로 반군과 그 지지자들을 학살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 전쟁으로 양측에서 약 1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45] 전쟁은 1929년,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 드와이트 모로의 중재로 멕시코 정부와 바티칸이 합의에 이르면서 휴전으로 종결되었다. 크리스테로 반군은 무기를 내려놓는 데 동의했다.[46]

전쟁 이후에도 카예스는 교육에 대한 국가의 완전한 통제를 주장하며, 가톨릭 교육 대신 세속적인 사회주의 교육을 도입하려 했다. 그는 "우리는 아이들의 의식, 젊은이들의 의식에 들어가 그들을 차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혁명에 속해야 하고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교육 정책의 목표를 분명히 했다.

교회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1926년부터 1934년 사이에 최소 4,000명의 사제가 살해되거나 추방당했으며, 예수회 소속의 미겔 프로 신부 처형은 국제적인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46] 전쟁 전 멕시코에는 4,500명의 사제가 있었으나, 1934년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사제가 1,500만 명의 신자를 대상으로 334명에 불과할 정도로 급감했다.[46][47] 1935년에는 17개 주에 사제가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48]

이러한 극심한 갈등은 카예스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1928년 선거에서 알바로 오브레곤이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49]

한편, 카예스 개인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는 그가 스피리티즘 신봉자였다는 주장[73]과 그의 내각에 프리메이슨 단원이 많았으며, 이들이 반성직자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분석[74]도 제기된다.

4. 대통령 퇴임 이후 (1928-1945)

1928년 대통령 당선자 알바로 오브레곤이 암살되면서, 임기를 마친 카예스는 헌법상 재임이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이 정치적 공백을 이용하여 1929년 국민혁명당(PNR, Partido Nacional Revolucionario|파르티도 나시오날 레볼루시오나리오es)을 창당했는데, 이는 훗날 제도혁명당(PRI)으로 발전하며 오랫동안 멕시코 정치를 지배하게 된다.

1929년 12월, 카예스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텍사스주 라레도의 지방 검사 존 발스(John Valls)는 1922년 루시오 블랑코 장군 살해 혐의로 카예스를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 국무 장관 헨리 스팀슨은 카예스에게 외교적 보호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카예스는 미 해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멕시코로 돌아갔다.[53][54] 이 사건은 멕시코와 라레도 시 간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으나, 허버트 후버 대통령과 텍사스 주지사 등의 중재로 해결되었다.[56][57][58]

1928년부터 1934년까지의 기간은 카예스가 공식적인 대통령직에 있지 않으면서도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로, '막시마토'(Maximato)라고 불린다. 이 기간 동안 에밀리오 포르테스 길, 파스쿠알 오르티스 루비오, 아벨라르도 로드리게스가 차례로 대통령을 맡았지만, 실권은 "최고 지도자"(Jefe Máximo|헤페 막시모es)로 불린 카예스가 쥐고 있었다. 카예스는 국방부 장관, 산업통상부 장관 등의 직책을 맡기도 했으나[59], 그의 실제 권력은 공식 직함 이상이었다. 이 시기 카예스 정부는 점차 보수화되어 멕시코 공산당을 금지하고 토지 개혁을 중단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60]

1934년, 카예스는 자신의 부하였던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PNR의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여 당선시켰다. 카예스는 카르데나스 역시 자신의 통제 하에 둘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61] 카르데나스는 취임 후 독자적인 좌파 노선을 걸으며 카예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카르데나스의 토지 개혁과 노동자 지원 정책은 카예스와의 갈등을 심화시켰고[62], 결국 1936년 카예스는 카르데나스에 의해 정치적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63][64]

카예스는 샌디에고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41년(일부 문헌에서는 1942년 또는 1944년으로 보기도 함)[75]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대통령의 허가로 멕시코로 귀국했다.[65] 귀국 후 그는 정치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보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멕시코가 추축국에 선전포고하는 것을 지지했다.[66] 그는 1945년 10월 19일 멕시코 시티에서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으며,[67]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돌로레스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9년 혁명 기념탑으로 이장되었다.

4. 1. 1928년 대선과 오브레곤 암살

알바로 오브레곤카예스의 4년 임기가 끝난 후 1928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이전에 대통령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마가 가능했던 이유는 1926년 카예스 행정부 하에서 비연속 재선을 허용하는 멕시코 헌법 개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50] 또한, 1927년에는 대통령 임기를 기존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헌법 개정도 이루어졌다.[52]

1928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오브레곤은 단독 후보로 나서 카예스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직후, 오브레곤은 로마 가톨릭 신자인 호세 데 레온 토랄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75]

오브레곤의 갑작스러운 암살로 인해 권력 공백이 생기면서 다시 카예스에게 힘이 집중되었다. 카예스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1928년 민족혁명당(PNR)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훗날 제도혁명당(PRI)으로 발전하게 되며, 카예스는 PNR을 중심으로 멕시코 혁명의 이념과 성과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려 시도했다.[75] 한편, 오브레곤의 재선을 가능하게 했던 비연속 재선 허용 조항은 이후 1934년에 다시 폐지되었다.[51]

4. 2. 막시마토 (1929-1934)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1929년에 창당한 국민혁명당(PNR)의 로고. 로고는 멕시코 국기의 색상과 배열을 따르고 있으며, 당의 머리글자가 독수리 문양을 대체하고 있다.


카예스 재임 기간 중의 멕시코 국기


카예스의 임기 4년이 끝나고, 그는 알바로 오브레곤을 후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오브레곤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전인 1928년 7월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인 호세 데 레온 토랄에게 암살당했다.[75]

오브레곤의 암살로 인해 권력은 다시 카예스에게 집중되었다. 카예스는 헌법상 대통령직에 복귀할 수 없었지만,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에밀리오 포르테스 길이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고, 카예스는 1929년 제도혁명당(PRI)의 전신인 국민혁명당(PNR, Partido Nacional Revolucionarioes)을 창당했다. 이 정당 창당은 멕시코 혁명을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

오브레곤이 원래 재임했어야 할 기간인 1928년부터 1934년까지, 카예스는 공식적인 직책보다는 배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스스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최고 지도자"(Jefe Máximo|헤페 막시모es)로 불렸으며, 이 시기는 그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막시마토(Maximato, 1928–1934)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에밀리오 포르테스 길, 파스쿠알 오르티스 루비오, 아벨라르도 로드리게스가 차례로 대통령직을 맡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카예스의 꼭두각시로 여겼다. 파스쿠알 오르티스 루비오는 카예스의 실권 행사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다 1932년 사임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카예스는 1929년 이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며 부패 척결을 내세웠고, 이후 산업통상부 장관도 지냈다.[59] 하지만 실제로는 막후에서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1929년, 미국 대사 드와이트 모로의 중재로 멕시코 정부와 크리스테로스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59]

막시마토 시기 카예스의 정책은 점차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1930년 대규모 시위 이후 멕시코 공산당 활동이 금지되었고, 니카라과의 세사르 산디노 반군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파업은 용납되지 않았으며, 농민에 대한 토지 재분배도 중단되었다. 카예스는 한때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점차 공산주의를 탄압하고 노동 운동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였다.[60]

193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PNR 내부에서는 카예스의 측근인 마누엘 페레즈 트레비뇨와 미초아칸 주지사이자 토지 개혁가로 인기가 높았던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후보로 거론되었다.[61] 카예스는 처음에는 트레비뇨를 지지했으나,[61] 당내의 압력에 밀려 결국 전직 혁명 장군이자 대중적 지지를 받던 카르데나스를 PNR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기로 동의했다.[61] 당시 PNR의 강력한 조직력 덕분에 카르데나스의 당선은 확실시되었고, 그는 1934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약 98%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다. 이로써 막시마토 시대는 막을 내리고 카르데나스 시대가 시작될 기반이 마련되었다.

4. 3. 카르데나스와의 갈등 및 추방 (1934-1941)

1934년 대통령 선거에서 카예스는 제도혁명당(PRI)의 전신인 민족혁명당(PNR) 후보로 사파타군 게릴라 출신인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지명했다. 카르데나스는 1915년 소노라에서 카예스 군대에 합류하는 등 20년 가까이 카예스와 관계를 맺어왔기에, 카예스와 그의 동맹들은 카르데나스가 이전 대통령들처럼 자신들의 통제 하에 있을 것이라 믿었다.[61]

카르데나스는 유효표의 98%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취임 직후 카르데나스는 카예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대농장 개혁, 강력한 토지 개혁 실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근대적 보통 교육 실시, 산업 자본의 횡포에 맞설 노동자 협동 단체 육성 등 멕시코 혁명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다.[75]

1945년 10월 19일 사망한 카예스의 유해는 그의 대모의 묘소에 아내 나탈리아 차콘과 함께 안치되었다. 1969년,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그의 유해는 혁명 기념비로 옮겨졌다.


카르데나스의 정책 방향, 특히 노동조합 지원과 파업에 대한 관용적 태도는 카예스와의 갈등을 야기했다. 카예스는 카르데나스의 정책을 비판했고, 카르데나스는 이에 맞섰다.[62] 1935년 6월, 카예스가 카르데나스의 좌파적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노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카르데나스를 지지하는 대규모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카르데나스는 정치적으로 카예스를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카예스파(Callistas)로 분류되는 인물들을 정부 요직에서 해임하고 추방했다. 여기에는 토마스 가리도 카나발, 파우토 토페테(Fausto Topetees), 에밀리오 포르테스 길, 사투르니노 세디요, 아론 사엔스, 니콜라스 로드리게스 카라스코, 파스쿠알 오르티스 루비오 등이 포함되었다.

카예스와 그의 오랜 정치적 동맹이자 노동조합 CROM의 지도자인 루이스 N. 모로네스는 마지막까지 영향력을 유지하던 카예스파 인물이었다.[59] 그러나 1936년, 카르데나스 정부는 카예스와 모로네스가 철도를 폭파하려 했다는 음모 혐의(정치적 명분으로 간주됨)를 적용하여 그들을 체포했다.

결국 1936년 4월 9일, 카예스는 모로네스, 루이스 레온(멕시코 급진 시민 연합 지도자)[63], 라파엘 멜초르 오르테가 장군(전 과나후아토 주지사)[64] 등 마지막 남은 핵심 측근들과 함께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의 아들 알프레도와 비서 역시 함께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망명한 카예스는 샌디에고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 이 시기 그는 한때 정치적 적수였던 멕시코 철학자 호세 바스콘셀로스와 교류하며 친구가 되기도 했다. 카예스는 망명 기간 동안 카르데나스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1941년(일부 문헌에서는 1942년 또는 1944년으로 보기도 함)[75], 카예스는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대통령의 초청으로 멕시코로 귀국했다.

4. 4. 망명 생활과 귀국 (1941-1945)

제도 혁명당이 권력을 공고히 하고 국가 통합을 추구하던 시기,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후임자인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대통령(1940–1946)은 화해 정책의 일환으로 1941년 카예스의 멕시코 귀국을 허용했다. 카예스는 말년을 멕시코 시티와 쿠에르나바카에서 조용히 보냈다.[65]

멕시코로 돌아온 카예스의 정치적 입장은 이전보다 온건해졌으며, 1942년에는 멕시코가 제2차 세계 대전추축국에 선전포고하는 것을 지지했다. 또한, 귀국 후 심령주의에 관심을 보여 멕시코 초심리학 연구 서클의 주간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최고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기도 했다.[66]

카예스는 1945년 10월 19일 14시 20분(CST), 68세의 나이로 멕시코 시티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그 주 초에 받은 수술 후 발생한 출혈이었다.[67] 그의 유해는 돌로레스 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69년 11월 혁명 기념탑으로 이장되었다.

4. 5. 사망

제도 혁명당이 권력을 확고히 하고 국가 통합을 추구하던 시기,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대통령(1940–1946)은 전임자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후임자가 추진한 화해 정책에 따라 1941년 카예스의 멕시코 귀국을 허용했다. 그는 말년을 멕시코 시티와 쿠에르나바카에서 조용히 보냈다.[65]

멕시코로 돌아온 카예스의 정치적 입장은 이전보다 온건해졌으며, 1942년에는 멕시코가 추축국에 선전포고하는 것을 지지했다. 또한 심령주의에 관심을 가져 멕시코 초심리학 연구 서클의 주간 모임에 참석하고 "최고 존재"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기도 했다.[66]

카예스는 1945년 10월 19일 14시 20분(CST, 협정 세계시 20:20), 68세의 나이로 멕시코 시티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그 주 초에 받은 수술 후 발생한 출혈이었다.[67] 처음에는 돌로레스 묘지(Panteón de Dolores)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11월 그의 유해는 혁명 기념탑으로 이장되었다.

5. 유산

혁명 기념비에 안치된 마데로, 카란사, 비야, 카르데나스, 카예스의 유해


1990년에 세워진 카예스 기념비는 1928년 9월 ''카우디요'' 시대의 종식을 선언한 그의 연설을 기념한다.


카예스의 주요 유산은 멕시코에 평화를 정착시킨 것이다. 그는 오늘날 제도 혁명당(PRI)으로 알려진 국민 혁명당(Partido Nacional Revolucionario, PNR)을 창설하여 멕시코 혁명의 폭력적인 시대를 끝내는 데 기여했다. 이 당은 2000년까지 멕시코를 통치했으며, 2012년 선거에서도 한 차례 더 집권했다.

카예스의 유산은 오늘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PRI 내부에서는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그의 유해는 원래 있던 곳에서 혁명 기념비로 옮겨져, 생전에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마데로, 카란사, 비야, 카르데나스와 함께 안치되었다. 오랫동안 카르데나스 대통령이 혁명의 이상을 되살린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멕시코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온 정당의 창시자로서 카예스의 중요성 또한 점차 인정받고 있다. 특히 1988년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아들이 PRI와 결별한 이후, 당 지도부는 창당 과정에서의 카예스의 공헌과 리더십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카예스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이는 1928년 9월 그가 ''카우디요'' 시대의 종식을 선언한 연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 연설은 오브레곤 암살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카예스가 창설한 당을 통해 대통령 승계 과정의 폭력을 해결하려는 시점과 맞물려 이루어졌다.[71]

그는 소노이타, 에르모시요, 그리고 그의 고향인 과이마스에 세워진 동상을 통해 기려지고 있다. 소노이타 자치구의 공식 명칭은 그를 기리기 위해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자치구로 명명되었다.

한편, 그의 반성직자적인 정책과 행동 때문에 교황 비오 11세(재위 1922–1939)는 회칙 ''Iniquis afflictisque'' (''멕시코 교회 박해에 관하여'')에서 카예스를 "부당한" 태도와 교회에 대한 "증오스러운" 태도를 가졌으며, "잔혹한"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72]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24년 대선멕시코의 대통령40대멕시코 노동당84.1%1,340,634표1위


참조

[1] 간행물 "A “Perfect Dictatorship”: The PRI, Corruption, and Autocracy in Mexico" 2021
[2] 학술지 Vargas Llosa: "México es la dictadura perfecta" 1990-09-01
[3] 서적 Mexico: Biography of Power HarperCollins
[4] 서적 Mexico
[5] 서적 The Mexican Revolution, 1910–1940 https://books.google[...] UNM Press
[6] 웹사이트 Francisco Elías Gonzalez https://www.nps.gov/[...] U.S. National Park Service 2024-05-03
[7] 서적 Mexico
[8] 서적 Mexico: Biography of Power
[9] 서적 The Mexican Revolution, 1910–1940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10] 서적 Mexico and the United States Marshall Cavendish Corporation
[11] 서적 The Sonoran Dynasty in Mexico: Revolution, Reform, and Repression https://books.google[...] U of Nebraska Press 2023
[12] 서적 Plutarco Elías Calles and the Mexican Revolution Rowman and Littlefield Publishers Inc.
[13] 서적 "The Mexican Revolution" in Mexico Since Independ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서적 "The Mexican Revolution"
[15] 학위논문 "A Biography of Luis N. Morones"
[16] 서적 Plutarco Elías Calles
[17] 서적 Plutarco Elías Calles
[18] 서적 Plutarco Elías Calles
[19] 서적 Plutarco Elías Calles
[20] 서적 "Alberto Pani Arteaga" in Encyclopedia of Lati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Charles Scribner’s Sons
[21] 학위논문 "Order and Progress: The Revolutionary Ideology of Alberto J. P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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